제학공(提學公)

 
제학공  한사기(提學公  韓謝奇 : 8세)

공은 고려(高麗) 후기의 문신(文臣)이다. 아버지는 문혜공(文惠公) 강(康 : 初諱 璟)이요, 조정대부행예빈경(朝正大夫 行禮賓卿)에 금자 광록대부 수사공 좌복야(金紫 光綠大夫 守司空 左僕射)에 추증된 광윤(光胤)의 손자이다. 《고려사약전(高麗史略傳)에 있는 유사(遺史 : 史蹟)를 실어서 후인이 항상 살필 수 있는 사료(史料)로 삼고자한다.

사적(史蹟) 번역문

《고려사(高麗史)》에 간략히 적었으되 충열왕(忠烈王) 원년 乙亥(단기 3608 · 서기 1275)년 6월 甲子에 새로 禿魯花(두루아치 : 즉 중국어로 인질을 말함)를 선정하는데 3계급을 특진발령한 관직을 주어서 보내기로 하였다. 도교서령(都校署令)에 임명된 한사기(韓謝奇)는 강(康)의 아들이요, 추밀 이분희(樞密 李汾禧)의 사위니, 나이 20미만으로 품계(品階)를 초월(超越)해서 八品에 배명(拜命)하게 되었다. 同 5년 己卯 3월 丁巳에 대방공 철(帶方公 澈)을 파견(派遣)하여 두루아치를 인솔하고 원(元)나라에 들어가게 하니 김방경(金方慶)의 아들 흔(흔)과 원전(元傳)의 아들 정(貞)과 박항(朴恒)의 아들 원타(元타)와 허 공(許 珙)의 아들 평(評)과 홍자번(洪子藩)의 아들 순(順)과 한강(韓康)의 아들 사기(謝奇)와 설공검(薛公儉)의 아들 지충(之沖)과 이존비(李尊庇)의 아들 우(瑀)와 김주정(金周鼎)의 아들 돌(돌) 등으로서 문벌 좋은 집 자제(子弟)들 25인이라 모두 3등급을 월등(越等)하여 관직을 주어서 보냈다. 문혜공 본전(文惠公 本傳)에 간략히 적었으되 아들 사기(謝奇)는 벼슬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고 아들 악(渥)과 영(泳)이 있다. 처음에 사기(謝奇)가 두루아치(禿魯花)로 선발되어 가족을 인솔하고 원나라에 들어가니 영(泳)은 어려서부터 황도(皇都)인 장안(長安)에서 성장하게 되었고 인종황제(仁宗皇帝)에게 사사(仕事)하여 벼슬이 하남로총관(河南路摠管)에 이르렀다. 영(泳)이 이렇게 영달(榮達)함으로써 아버지 사기(謝奇)에게 한림직학사 고양현후(翰林直學士 高陽縣侯)로 사직(賜職)하였다. 홍규열전(洪奎列傳)에 간략하게 적었으되 충열왕이 양가(良家)의 예쁜 여자를 선발하여 원나라의 황제에게 바치려고 하는데 추밀부사 홍 규(樞密副使 洪 奎)의 딸도 마침 선발되어 대열 속에 있었다. 규(奎)가 한사기(韓謝奇)에게 이르되 “나는 내 딸의 머리를 깍아서 이번 選出을 免하도록 할까 하는데 어떠할지요”하니,  사기(謝奇)가 그러면 그 화(禍)가 귀공(貴公)에게 미칠까 두려우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만류하였으나 규(奎)가 듣지 아니하였다 한다. 가정 이 곡(稼亭 李 穀)이 지은 정혜공 영(正惠公 泳))의 행장(行狀)에는 아버지 사기(謝奇)는 본국(本國)에서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조정대부우사의대부지제고(朝靖大夫右司議大夫知制誥)에 이르렀고 公(泳)의 영달(榮達)로 因하여 한림직학사아중대부경차도위(翰林直學士亞中大夫經車都尉)로 여러 차례 증직(贈職)을 받았으며 고양후(高陽侯)에 추봉(追封)되었으니 어머니 채씨(蔡氏)와 정씨(鄭氏)는 모두 고양군부인(高陽郡夫人)으로 추봉(追封) 되었다. 公은 鄭氏의 所生이다. 처음에 本國에서 세도(勢道)집 子弟들 중에서 질자(質子 : 인질)를 뽑아 보내는데  公의 부친이 역시 선출된 인질 중에 있었으므로 드디어 가권(家眷)을 인솔(引率)하여 왔다고 하였다. 공의 묘소(墓所)는 임진왜란(壬辰倭亂) 후에 실호(失護 : 잃어버림)되었다가 다시찾아 모신 경위를 소상히 알아야 되겠기에 내력(來歷)을 소개함이다. 특징(特徵)은 고려장의(高麗葬儀) 표본(標本)으로 四角 長方形의 석장(石杖) 호석(護石)의 분묘(墳墓)이다.

提學公 (諱 謝奇)의 墓

묘소(墓所) (보문각 제학공)

공(公)의 묘소는 광주읍 서쪽 소지면 서봉동 지금의 광산군 송정읍 서봉동 천등산 즉금 어등산 자좌(子坐)이다. 임진병란 후 실호되어 묘하(墓下)의 주민 오 성(吳 姓)이 비갈(碑碣)을 깨어버리고 투장(偸葬)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자리가 한정승묘(韓政丞墓)라는 전설이 인근에 구전되어 옴을 단서로 하여 순조 3년 계해(단기 4136 · 서기 1803)년에 후손 영의정 용구(用龜)가 해익(海益) 등 종인을 현지에 파견하고 광주 나주 양군수에게 서신을 보내어 산하 주민들과 함께 묘역 일대의 땅을 파고 믿을 만한 자취를 찾아보았더니 묘하(墓下)에 부서진 비석 한 조각에 우리의 성(姓)인 「韓」字가 분명하고 공의 諱字인 「謝」자는 오른쪽 가에 才는 파락(破落)되고 윈쪽편에 言과 중간의 身은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또 그 아래 「亞中」두 字가 분명히 남아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리하여 아중대부 휘 사기(亞中大夫 諱 謝奇)라고 각자(刻字)된 부분임이 명백하야 의심할 여지가 없으므로 묘하(墓下)에 거주하는 태중(台重)이라는 사람을 산직(山直)으로 정하여 수호하도록 하고 후일 다시 개봉축(開封築)하기로 하였다. 순조33년 癸巳(단기 4166 · 서기 1833)에 4월 후손 사신(思臣), 군수 낙철(洛轍)이 경향각처에 통문을 발송하여 묘하에서 종회를 열고 묘소의 개봉축 비석의 건립, 재실과 위사의 설비 등을 숙의하였으나 중론이 구구하여 뜻한 바 일을 성취하지 못하고 비분한 속에 세월만 흘러가고 있었다. 광복후 4년 무자(단기 4281 · 서기 1948)에 후손 복리(福履), 진환(振煥), 근섭(瑾燮), 제종의 발의로 각처에서 후손들이 분연히 일어나서 합심협력하여 다음해 기축년에 봉분을 개축하고 비석을 세우고 위토를 매입하였으며 제실(鳳崗齋)를 건축하고 매년 3월 3일에 세일제(歲一齋)를 봉행하여 금일에 이르렀다.

신도비명(神道碑銘)(譯文)(德殷, 宋 在晟 撰)

광주읍(光州邑) 서편( 西便) 30里 지점(地点)인 서봉동 어등산하 축간룡 자좌오향사파판국(樓鳳洞 魚登山 下 丑艮龍 子坐午向巳破版局) 자리가 바로 고려조정대부보문각제학고양현후한공사기(高麗朝靖大夫寶文閣提學高陽縣候韓公謝奇)의 묘소이다. 임진병란 후(壬辰兵亂 後)에 실전(失傳)되었더니 전하여 오는 말에 따르면 여기가 한정승묘(韓政丞墓)라 함으로 正廟辛亥(正祖 15年 · 檀紀 4124 · 西紀 1791)에 후손되는 대신 용구(大臣 用龜)가 여러 宗人 을 현지에 파견(派遺)하고 羅州, 光州 兩郡守에게 郡民 장정들을 징발(徵發)하여 신적(信蹟)을 찾아보도록 위촉(委囑)하였더니 墓下에서 파손(破損)된 碑조각이 발견되었는데 姓字인 韓 字는 分明하고 휘자(諱字)인 사 자(謝 字) 좌변(左邊)의 言과 身은 完在하니 우변(右邊)의 재(才)가 박락(剝落)되었고 또 작호(爵號) 中의 一部인 亞中이란 2 字가 있으므로 드디어 이를 신빙(信憑)하고 봉분(封墳)만은 즉수(卽修)하였으나 미처 수호대책(守護對策)까지는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 後 純祖 癸巳(檀紀 4166 · 西紀 1833)에 경향제종(京椰諸宗)이 碑石을 세울 것과 재실(齋室)과 位土를 설치(設置)하려고 상의(相議)하였으나 의론(議論)이 합치(合致)되지 않아서 시일만 끌어오다가 성사치 못하였음은 甚히 유감(遺憾)된 일이었다. 다행히도 數年 前 癸巳(檀紀 4286 · 西紀 1953)에 各 宗中의 議論이 統一되어 墓域을 미화(美化)하고 표석(表石)을 건립(建立)하며 재각(齋閣)을 창건(創建)하고 山直을 두고 位土를 마련하여 歲一祀를 行하게 되었으니 이제야 명명지중(冥冥之中)에 계신 영령(英靈)께서나 後孫들의 영모지정(永慕之情)에 多少나마 마음 놓을 수는 있게 되었으나 묘의(墓儀)를 완비(完備)코자 하면 의당(宜當) 격(格)에 맞는 신도대비(神道大碑)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해서 後孫 기흥(基興)이 여사열전(麗史列傳)과 가장(家藏)인 승첩(乘牒)을 提示하면서 無能한 나에게 碑文을 要請하는데 이번 일은 後孫 在根이 전체비용(全體費用)을 독담(獨擔)한 것이라 한다. 提學公의 배위(配位)는 세 분이 계시는데 延安 李氏는 密直事 汾禧의 따님이요 高陽郡夫人에 追封된 平康 蔡氏는 中贊을 지내고 諡號가 良淸公인 仁撥의 따님이고 또한 高陽郡夫人에 追封된 鄭氏는 宰相을 지낸 仁貴의 따님이다.

提學公의 齋室
提學公의 時享은 음 3월 3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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