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혜공(文惠公)

문혜공 한  강(文惠公  韓   康) 1228~?  7세)

문혜공은 고려 고종, 원종, 충렬왕(高麗 高宗 元宗 忠烈王) 때의 문신(文臣)으로 휘(諱)는 강(康)이요 초휘(初諱 : 初名)는 경(璟)이다. 예빈경공 광윤(禮賓卿公 光胤)의 아들이요 신호위 상장군(神虎衛 上將軍)에 의장부 별장(儀仗府 別將)을 지낸 희유(希愈)의 손자(孫子)이다. 고종 계묘(高宗 癸卯) 16세에 장원급제(長元及第)하여 화려한 관직(官職)과 영예(榮譽)를 입고 문혜(文惠)라는 시호(諡號)를 받은 분이다. 다음은 《고려사본전(高麗史本傳)》에 실린 사적을 소개한다.

문혜공 한  강(文惠公 韓  康) 사적(史蹟) 고려사본전(高麗史本傳) 번역문(譯文)

공(公)의 휘(諱)는 강(康)이요. 초휘(初諱)는 경(璟)이다. 고려 고종 16년 戊子(檀紀 3561 · 西紀 1228)에 生하고 고종 30년 계묘(癸卯)에 16세에 국자감시(國子監試) 장원(壯元)으로 과거(科擧)에 급제하였다. 여러 차례 승진(昇進)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고 외직(外職)으로 金州郡守로 부임(赴任)하였는데 卽 지금의 金海府이다. 그 前부터 이 고을에는 토지(土地)에 부과된 세금이 항상 배정된 세액을 충당하지 못하게 되어 군수가 즉결처분으로 파면당한 예가 많이 있었다. 공이 이 고을에 부임하여 군용지(軍用地)로 두었다가 버린 토지를 잘 운용하여 2천여 석의 곡물(穀物)을 收穫하게 되어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부과하지 않고서도 소정세액을 충당(充當)하는데 항상 여유가 있어서 이속(吏屬)들도 일손을 거두게 되고 백성들도 가사(家事)에 安定을 찾게 되었다. 이런 선정(善政)의 공적으로 예부랑중(禮部郞中)에 발탁(拔擢)되시고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승진전임(昇進轉任)하였다. 이 당시에 의정양부(議政兩府)에서 국사(國事)를 의정(議定)하는데 있어 피차가 간망(看望)하는 태도로 서로 주재(主宰)하는 자가 없었다. 이 까닭에 처음으로 재추소(宰樞所)를 설치하고 공에게 사존직(司存職)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 후 다시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로 또다시 중찬(中贊)으로 승진하시고 연로하므로 사임하였다. 충열왕 22년 丙申(단기 3629 · 서기 1296년)에 王(왕)이 公(공)에게 말하되 “과인(寡人)이 王位(왕위)에 오른지가 오래되어 이제 환갑(還甲)을 당하니 송구한 심사가 더욱 간절하오. 경(卿)은 내가 해야될 일을 일일이 밝혀서 말씀하여주오”하시었다. 公은 하나하나 조목(條目)을 들어서 진언(進言)하였는데 “종묘제사(宗廟祭祀)는 선왕(先王)을 받들어서 유덕(遺德)에 보답하는 일인즉 지금 묘사(廟舍)를 수리하고 악기(樂器)를 비치(備置)하여 시사(時祀)를 엄수토록 하실 것이요. 工商(공상)은 器物(기물)의 사용을 편리하게 하고 재물을 풍요하게 하여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온데 지금 정부 각 기관에서 수용하는 물품을 모두 시정(市井)에서 구입하는데 혹은 그 가격을 억지로 깎고 혹은 그 외상값을 보상하지 않아서 상공인들의 괴로움이 많은즉 이것을 금하시고 잡아온 생물을 놓아주시어 생명을 살려주는 것은 이것이 증수(增壽)하는 방법이니 청하옵건데 지금부터도 도살(屠殺)을 금지하고  수렵(狩獵)을 행락(行樂)으로 하는 일을 막으시고 기름지고 맛이 좋은 음식을 절약하여 심한 추위와 더위에 토장죽이라도 장만하여 의탁할 곳도 없이 기갈(飢渴)이 심한 백성들을 구호하시고 有司(유사)에게 하명하여 임자없는 시체라도 잘 매장하여 줌으로써 음덕(陰德)을 쌓게 하소서”하였다. 이 때의 왕이 혼암(昏暗)하기 때문에 공(公)께서 이같이 풍자(諷刺)해서 말씀하셨으나 왕은 이대로 시행치 못하였다. 충열왕 29년(단기 3636 · 서기 1303년) 계묘년 2월 22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76이요, 시호(諡號)는 문혜(文惠)이다. 公은 천성이 인자하여 재상직(宰相職)에 있어서도 온공(溫恭)하시고 근검하여 유학(儒學)의 교풍을 바탕으로 충열왕을 보좌하여 훈업(勳業)을 세웠고 사기(謝奇)와 보(譜 : 一名 謝譜) 두 아들을 두었다. 사기(謝奇)의 관직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고 악(渥)과 영(泳)의 두 아들을 두었다. 처음에 사기(謝奇)가 두루하치(禿魯花 : 質子)에 선발되어 가족을 인솔하고 원(元)나라에 들어가니 영(泳)은 어려서부터 황도(皇都)인 장안(長安)에서 성장하였으며 인종황제(仁宗皇帝)에게 사사(仕事)하여 벼슬이 하남로총관(河南路摠官)에 이르렀다. 영(泳)이 이같이 영달(榮達)함으로써 원조(元朝)에서 부친인 사기(謝奇)에게는 한림직학사 고양현후(翰林直學士 高陽縣侯)를 증직(贈職)하고 조(祖) 강(康)에게는 첨태상예의원사 고양현백(僉太常禮儀院事 高陽縣伯)을 증직(贈職)하였다. 

文惠公(韓 康)의 墓

묘소(墓所 : 文惠公)

문혜공의 묘소는 世上이 변란을 거치는 사이 오랜 세월 실전(失傳 : 잃어버림)하였다가 다시 봉심(奉審 : 찾음)하는 애환을 겪었으므로 그 사실을 전해오는 대로 다음과 같이 싣는다. 공의 묘소는 전남 영광군 무량면 덕흥리 노인봉 아래 유좌(酉坐)에 배위 아선군부인 함종 임씨(咸從 任氏)와 합조(合兆)이시다. 묘소가 오랫동안 실전(失傳)되었더니 영광읍 오리 주산동편에 위치한 산골에 동향으로 자리한 큰 무덤이 있는데 옛날부터 인근에서 한시랑묘(韓侍郞墓)라고 구전하여 왔고 또 신사동 예빈경 부군 산소(薪寺洞 禮賓卿 府君 山所)와 불과 이십리 거리이며 墓下에 한시랑제(韓侍郞堤)라고 칭하는 제당(堤塘)이 있으며 법성포 남방(法聖浦 南方)에 유허(遺墟)가 있는데 지금에도 그 동명을 한시랑동(韓侍郎洞)이라고 칭하여 온다.  공께서는 일찍이 공부시랑((公部侍郞)을 역임하신 바 있으나  그 외에는 한씨로서 시랑직(侍郎職)을 역임한 분이 없다. 그런고로 이 묘가 바로 공의 산소가 아닌가 하여 신사동묘(薪寺洞墓)를 개봉축할 때 종중에서 후손 철증을 파견하여 봉분을 파고 지석을 찾아보았으나 아무 표적도 없었고 관에 제소하여 모장(冒葬)한 자인 서시원(徐始遠) 등을 문초하여 옛날부터 전하여 오던 시랑묘(侍郎墓) 표석의 소재를 추궁한 결과 묘역 부근에서 부서진 비(碑) 돌조각에서 한(韓) 字 한 字만을 발견하였을 뿐이고 분명한 신적을 얻지 못하였다.  그런즉 표석도 유실되었고 다른 신표(信表)도 없이 함부로 공의 묘소라고 질정(質定)할 수가 없어서 이런 기록만을 보존하여 두고 후의 신적(信蹟)을 찾을 기회 오기를 대망중(待望中)이러니 純祖 二十三年 壬午(단기 四一五五 · 서기 一八二二年)에 후손인 시임(時任) 영광군수 기유(耆裕)와 무안군수 익상(益相)과 경철(慶喆)이 그 동리(洞里)에 가서 극력탐색(克力探索)하여 신적을 얻어서 위토와 재실(齋室)을 설비하여 세일사(世一祀)를 봉행토록 하였고 육년 후 무자에 법성첨사 도유(法聖僉使 道裕)와 전라수사(全羅水使) 응호(應浩)가 표석을 건립하였고 乙未年(단기 四二五二 · 서기 一九一九年)에 후손 규철(圭喆), 규해(圭海), 영태(永泰)가 석의(石儀)를 중수하였으며 丙戌年(단기 四二七九 · 서기 一九四六年)에 모원재(慕遠齋)를 중건하고 매년 음 三월 二일 행사한다.  文惠公의 배위(配位) 아선군부인(牙善郡夫人) 함종 임씨(咸從 任氏)와 합조(合兆)이고 본래의 묘비는 묘소 실전(失傳) 때 같이 없어진 것으로 추측되나 확실한 기록이 없고 현재의 묘비는 1822년에 신적(信蹟)을 찾고 6년 후인 1828년에 세운 것이다.  이 신도비(神道碑)는 1941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규장각 직각(奎章閣 直閣) 조중목(趙重穆)이 지었으나 앞에서 게재한 문혜공(文惠公)의 사적(史蹟)과 묘소에 연관되는 문헌을 참고하여 살펴주기 바래서 전문은 싣지 않는다.  모원재(慕遠齋)는 1946년 중건하였다.

文惠公의 齋室(慕遠齋와 縣板)
時享은 음 3월 2일이다

한시랑동(韓侍郞洞)의 유래

한시랑동의 유래에는 구전되어 오는 여러 가지 설화가 있으나 우리의 선인들이 남겨놓은 문헌을 중심으로 살피는 것이 마땅하다는 판단에서 다음과 같이 한시랑동기적비문을 소개함이니 참고에 자료로 한다.

한시랑동기적비분(韓侍郞洞紀蹟碑文)

정부자(程夫子)가 안락정(顔樂亭)을 명하여 이르되 「물로 차마 버릴 수 없고 터도 차마 버릴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안자(顔子)가 즐겨  살던 곳에 옛날에는 정자가 없었는데 후현(後賢)들이 그 장소의 유서(由緖)마저 인몰(湮沒)될까 염려하여 정자를 세우고 명(銘)을 찬술(撰述)하여 영원토록 모앙(慕仰)하는 뜻을 표현한 것이니, 하물며 조상이 기거하시던 장소에 자손들의 추모하는 심정이 어찌 잠시인들 없을 수 있겠는가. 여기 영광군 군주산하의 한시랑동(韓侍郎洞)은 상당 한씨 선조(上黨 韓氏 先祖)의 유허이다.  去今 칠백여 년에 늪(沼) 도 대(臺)도 공지가 되고 잡초만 무성하여 초부목동(樵夫牧童)들이 살살 기어 다닐 뿐이어서 오가는 행인들까지도 탄식하게 되었으니 후손들의 통한이야 더욱 어떠할 것인가. 이러하기 때문에 비석을 세우고 그 사적을 기록하는 바이다.  조용히 생각하여 본즉 영광에 한시랑(韓侍郎)이라고 부르는 동리(洞里)가 삼개소(三箇所)인데 진량면 지장산하의 예빈경 휘 광윤(禮賓卿 諱 光胤)의 묘소와 무장면 노인봉하의 문혜공 휘 강(文惠公 諱 康)의 묘소와 이 동리와 아울러서 동일한 명칭을 쓰게 되었는데 삼가 안찰(按察)하여 본즉 남당 문순공(南塘 文純公)께서 지은 예빈경(禮賓卿) 비문에는 공께서 이곳에 적거(謫居)하시다가 별세하시니 여기에 장례를 모셨다는 부근 주민들의 전설이 있다는 구절이 있고 문혜공(文惠公)의 족보방주(族譜傍註)에는 법성포 남방(法聖浦 南方)에 한시랑 유지(韓侍郞 遺址)가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또는 우리 한씨 중에서 일찍이 시랑직(侍郞職)을 역임한 분이 없고 오직 공께서만 공부시랑(工部侍郎)을 역임한 바 있으며 다시 모원재(慕遠齋)에 소장된 고적조(古蹟條)를 살펴보면 후손 희맹(希孟), 수덕(粹德)이 우연히 이 곳을 지나다가 한시랑동(韓侍郞洞)이라는 동명에 상급하자 갑자기 심정이 감동하여 이것이 인연이 되어 양대 산소가 시랑동(侍郎洞)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니 이는 조고(祖考)의 영령(英靈)이 후손의 감정을 유발케 한 자연스러운 사리(事理)라 하겠다.  앞서 예빈경공(禮賓卿公)께서 먼 지방에 계시니 문혜공(文惠公)께서 시종한 것은 효도의 의당 있음즉 한 일이요, 그렇다고 해서 동명을 예빈(禮賓)이라 칭하지 않고 시랑(侍郎)이라 한 것은 예빈경공(禮賓卿公)의 일찍이 별세하신 후 문혜공(文惠公)께서는 장기간 거류하신 까닭이 아니었던가. 이것 또한 억측으로만 말할 바 아니다. 지난간 道光 三年 癸未(純祖 二十三年 · 단기 四一五六 · 서기 一八二三年)에 후손 필조(弼祖), 경유(慶裕)가 단소(短小)한 표석을 세웠으나 전연 사실을 기재한 것이 없고 토사(土砂) 중에 깊이 매몰되었는지라 서두에 말한 안락정(顔樂亭)의 폐황과 무엇이 다르다 하겠는가. 지금 신비(新碑)로 바꾸어 정결한 장소에 옮겨 세우고 전면에는 한시랑동기적비(韓侍郞洞紀蹟碑)라 새기고 후면에는 이글을 새겼다. 이제야 바다와 산이 번쩍번쩍 빛이 나고 초목도 곱게곱게 채색을 발휘하여 천년 전 옛 일이 오늘 일 같이 새롭게 되었으니 선조의 영령(英靈)께서 산광과 수색이 영롱한 속에 함강(陷降)하시면서 나에게도 후손이 있어 이 기지를 버리지 아니 하도다 하시며 환열하시는 듯 하다. 문순공(文純公)은 즉 예빈경공(禮賓卿公)의 십칠대손인 휘 원진(諱 元震)이요, 이 역사(役事)는 종중이 합의하여 화수계 자금으로 소요경비가 마련된 것이다.

韓侍郞洞遺墟碑

韓侍郞洞紀蹟碑

                         癸未(단기 四二七六 서기 一九四三年) 三월 二일 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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