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행록(學行錄)

 
한하운(韓何雲 : 1919~1975(시인))
본명은 태영(泰永). 함경남도 함주 출신. 종규(鍾奎)의 아들이다. 1932년 함흥제일공립보통학교. 1937년 동경 세이케이고등학교(成蹊高等學校) 2년을 수료하였다. 그해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1943년 북경대학 농학원을 졸업하였다. 1944년부터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에 근무하였으나 1945년 한센씨병(나병)의 악화로 관직을 사퇴하고 서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1946년에는 함흥 학생데모사건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바도 있다. 그뒤 치료비로 가산을 탕진하고 1948년 월남, 유랑의 생활을 하였다. 그뒤 자신의 투병생활과 함께 1950년 성혜원(成蹊園), 1952년 신명보육원(新明保育院) 등을 설립, 운영하였고, 1953년 대한한센연맹위원회장으로 취임하여 나환자 구제사업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66년에는 한국사회복귀협회장을 역임하는 한편, 무하문화사(無何文化社)라는 출판사도 경영한 바 있다. 그의 창작활동은 학창시절부터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문단활동은, 1949년 이병철(李秉哲)의 소개로《신천지 新天地》4월호에 <전라도길>외에 12편의 시를 발표하면서부터 전개되었다. 같은 해에 첫 시집 《한하운시초》를, 1955년에는 제2시집 《보리피리》를, 1956년에는 《한하운시전집》을 펴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는 시를 거의 쓰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나환자라는 독특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감상성으로 흐르지 않고 객관적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온전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서정적이고 민요적인 가락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도 그의 시적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유해는 경기도 김포군 장릉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저서 외에,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1957), 자작시해설집 《황톳길》(1960), 《정본(正本)한하운시집》(1966) 등이 었다.
한하운시초 韓何雲詩妙
한하운(韓何雲)의 제1시집.
변형 A5판, 70면. 1949년 정음사(正音社)에서 간행되었다.
<전라도길> · <손가락 한마디> · <벌> · <목숨> · <삶> 등 25편의 시와, 그를 시단에 소개한 이병철(李秉哲)의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에 나올 때 한하운은 방랑생활 중인 나병환자였다.
따라서, 이 시집과 그 뒤에 발표된 그의 모든 시에는 나병환자라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과 그에 따른 처절한 체험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그 체험은 그 자체가 특이한 것이기에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한하운은 감상을 자제하고 그것을 객관화함으로써 표현효과를 더욱 높이고 있다. ‘소록도로 가는길’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전라도길>에는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이 시의 제5연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 발가락이 또 한개 없다.”는 대목은 제6연의 “앞으로 남은 두개의 발가락”과 더불어 환자의 나병이 절망적으로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는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하는 객관성을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객관성은 환자의 비통한 체험에 대한 상상적 추체험(想像的 追體驗)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집에는 또 처참하게 버림받은 자의 애절한 꿈을 민요적 가락으로 읊은 시도 수록되어 있다. <파랑새>라는 작품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소월시(素月詩)의 민요적 기풍을 방불하게 하는 이러한 경향은 제2시집 《보리피리》에 수록되어 있는 <보리피리>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시집은 한국 신문학사에 등장한 최초의 나환자 시집으로서 특이한 체험을 객관적인 어조로 혹은 민요적 가락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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