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정공 한융전(胡靖公 韓隆田 : ?∼1442 11世)
公의 諱는 융전(隆田)이니 초명(初名)은 용천(龍天)으로 안천부원군 경(安川府院君 卿)의 아들이고 정승공(政丞公) 규인(珪仁)의 손자이다.
태종(太宗) 때 백신(白身 : 과거를 치르지 않으신 분)으로 사재부정(司宰副正)이 되고 세종(世宗) 15년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올랐으나 公이 향리(鄕里)로 물러가기를 원하더니 이때에 졸(卒)하였다. 나라에서는 하루동안 조회(朝會)를 폐하고 중사(中使)를 보내 조문(弔問)하고 부의(賻儀)를 내리고 시호(諡號)를 호정(胡靖)이라 증(贈)했다.
公의 묘소(墓所)는 함주군 상조양면 화음리(咸州郡 上朝陽面 花陰里) 보일형(寶일形) 간좌(艮坐)인데 배위 정부인(配位 貞夫人) 이씨(李氏)는 公의 묘전(墓前)이고 후배(後配) 정부인(貞夫人) 김씨(金氏)는 선배 이씨(先配 李氏)의 묘전(墓前)이다.
다음은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있는 유사(遺事)이다.
 
지돈녕부사시호정한공(휘 융전)유사(知敦寧府事諡號靖韓公(諱 隆田)遺事)(世宗莊憲大王實錄)
世宗 24 壬申年(檀紀 3775 · 西紀 1442) 6月 18日 지돈녕부사 한융전(知敦寧府事 韓隆田)이 졸(卒)하다. 처음 이름은 용천(龍天)이니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이모제(異母弟)이다. 태종조(太宗朝)에 백신(白身)으로서 바로 사제부정(司宰副正)에 임명되었는데, 이로부터 산직(散職)에 버려두고 물러가 전장(田庄)에 있었다.
世宗 15年 癸丑(檀紀 3766 · 西紀 1433)에 世宗이 불러 서울로 오게하여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발탁하고 또 의대(衣帶)을 내리매 公이 다시 향리(鄕里)로 물러가기를 원하더니 이때에 와서 졸하다. 나이 74歲였다. 王이 부음을 듣고 하루동안 조회를 폐하고 조문(弔問)과 부의(賻儀)를 가하게 하다. 호정(胡靖)이란 시호를 내리니 여러 해동안 수고(壽考)한 것을 호(胡)라 하고 유화(柔和), 정직하여 고종(考終)한 것을 靖이라 한다. 아들로는 得守, 得明, 得生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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