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충공 한교(文忠公 韓 교 : ?∼? 12世)
公의 韓는 교(교)요 字는 명보(明甫)요 호(號)는 회묵재(晦默齋)요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우(祐)의 아들이고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용(龍)의 孫子이다.
다음은 문충공(文忠公 : 교)의 유사(遺事)이다.
 
금계군문충공(휘 교)유사(錦溪君文忠公(諱 교)遺事)
公의 姓은 韓이요 휘(諱)는 교(교)요 字는 명보(明甫)요 호(號)는 회묵재(晦默齋)요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니 금주군(錦州郡) 분이라 父親 휘(諱)는 우(祐)니 中郞將이며 公이 탄생(誠生)할 때 채운(彩雲)이 公의 집을 덮으며 황룡(黃龍)이 집을 감고 향기(香氣)가 끓어 오르는지라 기이(奇異)하여 기록(記錄)하여 두었더니 이날 과연(果然) 公이 탄생(誠生)하니 천자(天資)가 이범(異凡)하고 성품(性品)이 영오(穎悟)하였다. 公의 나이 19세에 母夫人이 병환(病患)으로 날이 깊으매 분변(糞便)이 달고 씀을 맛보아 증후(症候)를 살피고 혈지(血指)를 관구(灌口)하매 회생(回생)하여 數月後에 별세(別世)하니 죽(粥)과 곡읍(哭泣)으로 3年을 시묘(侍墓)하였다. 마을이 감화(感化)되어 그 마을을 孝子里라 이름하고 촌전(村前)에 효자비(孝子碑)를 세우니라. 公이 등제(登第)하여 벼슬이 보문각 직제학(寶文閣 直提學)에 이르고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성(誠)을 다하여 奉仕한 공훈(功勳)으로 금계군(錦溪君)으로 封하고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이라 하다. 享年 65에 졸하니 墓는 郡南草峴 五里 쯤의 大寶山에 있다. 誌에 이르기를 忠誠은 三朝에 저명(著名)하고 효도(孝道)는 10里까지 敎化되었으며 朝廷에 오르면 대절(大節)을 지키고 國家의 승(乘)을 소양(昭揚)하여 嘉靖庚戌(3883)에 明宗大王이 公 의 충효(忠孝)를 가상(嘉尙)히 여겨서 정려(施閭)를 명하시다. 임진왜구(壬辰倭寇)가 침입(侵入)하여 公私家舍를 탕잔소(蕩殘燒)할새 孝子里에 이르러 정려(施閭)와 비(碑)를 보고 公의 孝에 감복(感服)하여 침입(侵入)하지 아니하야 孝子里는 화(禍)를 면(免)하였도다. 公의 효성(孝誠)은 이국인(異國人)에게도 이같이 感服을 주었다. 향유(鄕儒)들이 德을 추모(追慕)하여 사(祠)를 지어 향사(享祀)하니 君子의 道는 멀어질수록 더욱 나타남을 公을 보아 알겠도다. 슬프다. 公의 忠孝는 국승(國乘)에 수록(收錄)되었고 또 한 유곡사(柳谷祠)를 創建하니 그 가언선행(嘉言善行)은 당시(當時)에도 빛이 났고 후세(後世)에 전(傳)하여 남을 것이나 애석하도다. 年代가 멀고 누차 兵火를 거쳐 문헌(文獻)을 구할수 없으니 무엇으로 그 행장(行狀)과 덕(德)을 상고하리. 公의 실행(實行)이 금산군 지여지승람정려음기서원유사(錦山君誌輿地勝覽旌閭陰記書院遺事)에 대략 수록(大略 收錄)된 바로 흠앙(欽仰)함이 오래더니 이에 그 後孫 道洙 相五 甫가 公의 유사기록(遺事記錄)을 나에게 청(請)하기로 국승(國乘)과 가보(家譜)에 의(依)하여 우(右)와 여(如)히 펴노라.
崇禎紀元後三壬辰)(4105, 1772) 陽月 上浣 10月 15日
                               通訓大夫 慈仁縣監 愼認明 謹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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