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공 한치인(恭安公 韓致仁 : 세종 3년(1421)~성종 8년(1477) 14世)
 조선조 초기의 문신, 양절공(襄節公 : 確)의 큰 아들로, 순창공(淳昌公 : 永정)증 영의정의 손자이며 어머니 남양부부인(南陽府夫人)은 대제학 문양공 여방(文良公 : 汝方)의 따님이다.   세종 26년(1444) 우세마로 음보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세조 4년(1458) 사재감정 (司宰監正), 동왕 7년 첨지중추원사, 동왕 8년 공조참의, 동왕 12년 가선대부로서 전주부윤에 부임하여 하루도 휴식하지 아니하고 진심 갈력(盡心 竭力 : 마음과 힘을 다 함)하여 성실하게 집무(執務)하니 측근들이 건강에 해가 될까 염려하여 휴식정양(休息 靜養)할 것을 누차 권하여도 듣지 아니하고“내가 신하로써 국록(國祿)을 먹으면서 어찌하여 직무를 태만히 할 수가 있겠는가”하였다.
 이렇듯 정무의 과로로 인하여 신병이 심하여 동왕 13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으나 조정의 강한 권유로 예종 원년(1469) 호조참판으로 배수되고 성종 원년(1470) 가정대부로 가자(加資)되며 서성군(西城君)에 봉해졌다.
 동왕 2년‘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에 녹훈되고 자헌대부 중추원사로서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동왕 3년 지돈녕부사와 도총관을 역임하였다.
 동왕 5년 다시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동왕 6년 숭정대부 판돈령부사로 승진되었으나 숙환(宿愚 : 오래된 병)으로 사직을 청하니 왕은 허락하지 아니하고 당분 간 조용히 휴양할 것을 권하였다.
 동왕 8년 졸하니 왕은 조회를 정지하고 부의를 하사하며 장례는 예장(禮葬 : 국장)으로 하라 하고 시호를 공안(恭安)이라 내렸다.
 배위는 정경부인 백천 조씨(白川 趙氏)니 참찬공(參贊公 : 瑞安)의 따님이다. 슬하에 4남 3녀를 낳으니 장남은 참판공(參判公 : 한)이요 2남은 우윤공(右尹公 : 찬)이고 3 남은 참판공 건(參判公 健)이며 4남은 시정공(寺正公 : 宗)이다.
 
 位置 : 楊州君 隱縣面 龍岩里
 歲享日 : 陰 10月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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