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미상편(世系未詳篇 : 高麗)

 
평리공 한방언(評理公 韓 邦 彦 : ?∼禑王朝)
고려 우왕(禑王) 때의 무신(武臣)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인데 그 선계는 알지 못한다. 일찍이 무부(武夫)로 출사하여 여러 군직을 역임하고 군기감(軍器監)이 되었다. 홍건적이 침입하자 이를 평정하고 경성을 수복한 공을 녹하여 2등공신이 되었다. 동왕 20년(1371) 8월, 동지밀직 정사도(同知密直 鄭思道)가 사선으로 경사(京師)에 가서 신년을 하례코자 하였으나 교동도(蕎桐島)에 이르러 배가 좌초되어 가지 못하고, 다시 그 해 9월, 밀직부사(密直副使) 한방언을 사신으로 삼아 신년을 하례코자 출발하였다가 문득 폭풍을 만나 요동(遼東)을 경유하여 경사에 들어가 하정(賀正)하고 돌아왔다. 동왕 23년(1374) 4월에 명제(明帝)가 예부주사 임 밀(禮部主事 林 密)과 자목대사 채 빈(자收大使 蔡 斌)을 보내와 양마(良馬) 2천필을 요구하니 이에 문하평리 한방언을 탐라(耽羅)에 보내어 취(取)하도록 하였다. 그 해 7월, 한방언이 탐라에 이르니 합치(哈赤), 석질리(石迭里), 필사초고(必思肖古), 독불화(禿不花), 관음보(觀音保) 등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어찌 감히 세조황제(世祖皇帝 : 忽必烈)가 놓아 기르게 한 말을 명나라에 바칠 수 있으랴” 다만 3백 필만을 보냈다. 이에 임 밀 등이 왕에게 아뢰기를 “탐라의 말을 2천필의 소효를 채우지 않는다면 명제(明帝)가 반드시 우리들을 죽일 것이오니 청컨대 오늘 주상께 죄를 받겠습니다.”하니 왕이 답을 하지 않았다. 임 밀 등은 다시 왕에게 공마(貢馬)의 정수(定數)를 채우지 못한 죄를 벌하여 죽이기를 청하니 그 대신 곤장을 쳐서 귀양보내고, 8월에 종친, 재추(宰樞), 대언(代言) 이상 관원에게 각기 말 한 필을 내어 명나라에 바치는데 돕게 하는 한편, 탐라 정벌을 의논하고 문하찬성사 최 영(門下贊成事 崔 瑩) 등에게 명하여 전함 314척과 날쌘 군사 2만 5천 6백명을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였다. 최 영의 군사들은 탐라에 들어가 기병 1천명을 무찌르고 마침내 탐라를 평정하였다. 그 해 10월 한방언은 순문사(巡問使)가 되었는데 양광도안무사 정 비(楊廣道安撫使 鄭 庇)와 더불어 왜적을 막지 못하였다는 사헌부(司憲府)의 논핵(論劾)을 입고 술졸(戌卒)로 편입, 정배(定配)되었다가 풀려나와 우왕 원년(1375), 동지밀직(同知密直)으로 양광도부원수 겸 도순문사가 되어 경양현(慶陽縣)에 침구(侵寇)한 왜적과 싸웠으나 패전하였다. 그 후 안주도병마부원수(安州道兵馬副元帥)를 거쳐 다음 해 판밀직(判密直)으로 안주 도병마원수를 겸하고, 다음 해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양광도 조전원수(楊廣道 助戰元帥)가 되고, 동왕 3년(1377) 왜구(倭寇)가 각처에 만연하거늘 평리상의(評理商議) 한방언, 밀직상의 김용휘(金用輝), 동지밀직 경 의(慶 儀)를 양광, 전라, 경상도 조전원수로 삼아 진영(陣營)을 가다듬고, 그 해 5월에 왜적 기병 7백과 보병 2천 여명이 진주(晋州)를 침범하니 한방언, 김용휘, 경 의 등이 반성현(斑城縣)에서 이를 맞아 싸워서 적 13급을 베고 격퇴시키니 그 전공을 위로하고 물건을 차등있게 주었다. 이듬 해 왜적이 또 영광(靈光), 광주(光州), 동복(同福) 등지에 침범하거늘 순천도병마사 정 지(順天道兵馬使 鄭 地)가 순문사 지용기(都巡問使 也湧奇)와 조전원수(助戰元帥) 한방언, 이 림(李 琳) 등과 더불어 옥천현(玉泉縣)까지 추격하니 왜적이 미라사(彌羅寺)에 들어가므로 아군이 이를 포위하여 불태우고 군사를 놓아 쳐서 말 백 여필을 노획하는 큰 전공을 세웠으며, 그 해 10월, 왜적이 또 옥주(沃州), 진동(珍同), 회덕(懷德), 청산(靑山), 임주(林州) 등지에 침범하였는데 양광도원수로서 이를 격파하여 2명의 목을 자르고 말 10필을 노획하였다. 동왕 6년(1380) 안주도원수(安州道元帥)가 되고, 8년 초에 또 문하평리 서북면도체찰사 겸 안주도 상원수(上元帥)로 삼아 정요위(定遼衛)를 방비하게 했다. 그 해 4월, 왜적이 죽령(竹嶺)을 넘어 단양(丹陽)을 침범하거늘 한방언은 양광, 전라도 도지휘사 변안열(邊安烈)과 함께 이를 쳐서 80 여급을 베고, 말 2백 여필을 노획하였으며, 또 5월에는 왜적이 영춘현(永春縣)을 침범하여 안동(安東)에서 이를 맞아 싸워서 30 여급을 베고 말 60 여필을 노획하였다. 동왕 9년(1383)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명나라의 북변 침입에 대비했으며, 11월, 도순찰사로서 청풍현(淸風縣)을 침략한 왜적을 금곡촌(金谷村)에서 8급을 베고 격퇴시켰다. 한방언은 충열의 기개(氣槪)가 높고 나라를 수호한 공적이 실로 위대하였으나 그 공 명(功名)이 드러남이 적으니 애석하다 하겠다. 더욱이 생졸과 자손도 모두 사실(史失) 되어 알지 못하니 이것 또한 여말(麗末)의 정세불안으로 그렇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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